“그러고 보니 너 내 옆에서 꽤 오래 지냈구나.”
“이제 아셨사옵니까. 새벽까지 책을 읽으시는 어전에서 꾸벅꾸벅 졸다가 불벼락을 맞은 적도 여러 번이온데요.”
“하, 너도 참 물건이다. 서 상궁은 너만 보면 콧김을 뿜더군. 그 수더분한 사람을 흉악하게 만들다니, 재주라면 재주야.”
웃음기가 잔상으로만 남을 즈음 왕의 눈빛이 흐려졌다.
“하긴 너에게 휘둘리는 게 비단 서 상궁만은 아니지. 나 역시…….”
말을 하다 말고 그는 입을 꾹 다물었다. 뜨겁고 하얀 김이 시야를 막는 가운데서도 두 사람의 눈은 너무나 쉽게 마주쳤다.
“너 나이가 어찌 되느냐?”
“계유년생이옵니다만…?”
“흠, 생각보다 많이 먹었구나. 나보다 한참 어릴 줄 알았는데……. 계유생이라면 별로 차이 나지도 않는군.”
“아무렴 궐에서 지낸 지가 십수 년인걸요.”
“한데 그 나이 먹도록 어찌 그리 허술하더냐?”
왕의 시선이 그녀의 이마부터 눈, 코, 입술, 목덜미까지 느릿하게 따라 내려온다.
“되바라진 척 해봤자 순진한 티가 나.”
“예에?”
“분에 넘치게 알지, 주제도 모르고 따박따박 말대꾸하지, 염치도 없이 사내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지……. 계집 흉내는 내려야 못 내는 맹탕이고.”
왜 갑자기 욕을 먹는지 덕임은 어리둥절했다.
“그래도 일단 계집이라고, 행여 덕로가 지나갈 때면 뻣뻣해지더군.”
화제가 요상한 방향으로 튀었다. 왕은 혀를 찼다.
“꼴사납다.”
“그건 승지 영감이……!”
음험한 사람이라 그렇다고, 마주칠라치면 뭔가 꿍꿍이를 품은 양 싱긋 웃는 게 기분 나빠서 그렇다는 변명이 목구멍까지 올라왔다. 삼켜야 했다.
“승지 영감이 뭐?”
“……사내는 낯설어 그런 것뿐이옵니다.”
“나한테는 아니 그러면서.”
왕이 눈을 가늘게 떴다.
“사내가 낯설다면서 어찌 내 앞에선 활개를 치느냐고? 사내로 본 적이 없다는 둥 주제 넘는 소리나 하고 말이야.”
은근한 투정은 몹시 잔질어서, 덕임의 속에서도 묘한 것이 움텄다.
“너처럼 이상한 계집은 처음이다.”
왕이 골몰했다.
“옆에 있으면 골리고 싶고 없으면 괜히 아쉬워. 날 무서워하게끔 만들고 싶은데 막상 그리되면 서운할 것도 같고. 내가 너에 대해 잘 안다고 생각할 때마다 오히려 내가 생각지도 못한 소릴 하고……. 참으로 거슬리는 계집이야.”
위험하다. 본능적으로 느꼈다. 더 이상 알아서도, 다가가서도 안 될 것만 같다. 거슬린다는 그 한마디가, 지금까지 왕이 늘어놓은 괴이한 말들을 짜 맞추는 열쇠가 된 것처럼,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내가 너에게 휘둘리고 있나?”
그가 물었다.
“아니면 네가 나한테 휘둘리고 있는 건가?”
그가 다시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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